바벨 (B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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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은 브래드 피트라는 이름, 혹은 골든글러브 수상이나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같은 광고를 보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됐다면 꼭 한번쯤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거다. (같이 본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 괴롭게 하는 영화'이다.) 낮시간이라 몇 안되는 사람들이 보고 나오면서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도대체 뭔소리야?"였다. 평범한 헐리우드 상업영화라는 생각을 하고 극장을 찾는다면 7천원의 시간과 2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_-;;

일단 이 영화의 제목인 바벨에 관하여..

[성서] 바벨 <Babylonia의 고대 도읍> : 창세기 11장 1절 - 9절에 등장하는 탑
태초에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다. 인간이 하늘에 도전하여 탑을 쌓아 올리자, 신이 분노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시고 그 사이에 혼돈과 단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 네이버 영화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인간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였던 언어가 여러가지로 갈리면서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과 불신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인간 사이의 반목과 불신이 이 영화에서는 비단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오해를 하며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인간들을 보여주면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고립되고 있고, 그런 고립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로 그냥 보러 가서 나름대로 순수하게 느낀점들과 인상깊었던 장면들을 써보자면, (영화 보고 나와서 영화평을 보니 "아, 이런 것도 있었나?" 싶은게 꽤나 많을 정도로 영화에 대해 조예가 있다거나 깊은 지식이 있지는 않다. 그냥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것을 밝힌다.)

일단 영화 초반의 케이트 블랑쉐의 연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이 배우 잘 알지도 못하고 그냥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 여왕(?)으로 나왔다는 정도? 중후반부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나 격한 감정을 보이는 장면들보다 오히려 미묘한 표정만으로 남편 역할을 한 브래드 피트와 뭔가 불편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를 보여주었던 처음 등장한 씬에서의 연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랑쉐의 아들, 딸이 보모의 아들의 결혼식때문에 보모와 함께 보모의 아들의 결혼식 때문에 멕시코에 가게되는데, 멕시코에서의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고 해야하나? 처음에는 멕시코로 간다고 하니 "멕시코는 무서운곳 아니에요?" 하던 어린 아이들이 그 곳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전혀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게, 모로코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보이는 서구인들이 모로코인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두려움,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려는 보모와 그 조카에 대한 미국 경찰들의 적대적인 시선과 극명히 대비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문화,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일단 편견을 가지고 서로 가까워지지 못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어린 아이들은 편견없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금새 동화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저런 가치관으로 자기 스스로 벽을 쌓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은 매몰차게 배척하는 사람들,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일본 여고생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일본에서의 에피소드에서 여고생이 남자들과 어울려서 클럽에 가는데 그곳에서의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여고생은 농아(聾啞)인데, 고막이 찢어질듯한 음악이 울리는 클럽 한가운데에서 자신만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 현란한 조명은 눈을 어지럽히고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듣지도 못하는 음악에 맞춰 애써 몸을 움직이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자기가 맘에 들어했던 남자를 빼앗기고 만다. 카메라가 여고생의 시선으로 옮겨가면서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다시 소리가 돌아왔을때 그 여고생의 몸짓은 더욱 더 애처롭게만 보인다. 보고 있는 것도 괴로운데 진짜 저 상황이 되면 얼마나 괴로울까?

그리고 일본에서의 에피소드에서 여고생의 집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은 화려하게 빛나는 초고층의 빌딩들이 혹시나 바벨탑을 암시하는게 아닌가 하는거였다. (제목밖에 모르고 가서 엄청난 비약이 있었을수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올린 거대한 탑,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 속에서 홀로 고립되어가는 한 소녀. 우리가 쌓아올린 이 문명은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줬는가를 자꾸 반문하게 만드는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비단 일본의 야경에서 뿐만 아니라 4개국에서 각각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가 쉽게 못사는 나라,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멕시코와 모로코에서 그 곳 사람들의 삶을 보면 과연 어떤 삶이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흙먼지가 눈을 가리는 멕시코에서의 결혼식, 모로코에서 살고 있는 어린 아이들과 미국인 부부가 어쩔수 없이 머물게 된 마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더 행복해 보이는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듯 싶다.

일본에서의 장면중에 생각나는 또 다른 장면은 후반부에 경찰이 홀로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었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 뉴스에서 미국인 부부의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아주 짤막하게 나온다. 한 사람, 한 부부에게는 피를 토하는 고통을 맛보게한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 몇초만에 설명할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수도 있다는 것. 우린 서로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 자신, 자신의 가족, 자신의 친구가 아닌 모르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미국을 하나의 배경으로 잡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미국이 나오는 장면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거니와 (브래드 피트 가족의 집말고는 아무것도 안나온다) 미국인도 한 가족 말고는 영화의 종반부까지 거의 한명도 안나온다. 후반부에 조금 나오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참 추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케이트 블랑쉐가 헬기에 실려서 병원으로 후송될때를 보면, 헬기가 떠나기 전에 모로코 마을 사람들이 보내는 따뜻한 시선과 헬기에서 내릴때 미국인들의 시선이 극명히 대비된다. 헬기가 떠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을 이곳 저곳에서 헬기를 보고 있는 모로코 인들을 비춰준다. 이들은 일면식 없는 외국인 부부, 그것도 총을 맞아서 생사를 넘나드는 부부에게 비록 가진것은 없지만 자신들이 할수 있는 도움을 주었고 떠나는 부부에게도 진정으로 걱정하는, 진심어린 시선을 보낸다. 반면 헬기에서 내린 부부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외교관들과 기자들뿐.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늦었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관료들과 자신의 기사에 사용될 사진 한장을 위해 연방 플래쉬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졌다고 해야하나.
다음으로 미국인이 나오는 장면은 결혼식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검문소에서이다. 멕시칸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미국 경찰들. 과연 그 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미국인이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바벨이 던져주는 문제의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바벨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이 서로를 불신하고 오해하게 된 이유가 인간의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소통 뿐만 아니라, 같은 언어, 같은 문화, 심지어 가족, 피를 나눈 부녀 사이에서도 소통이 단절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현대사회의 또다른 문제점을 짚어낸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또 다른 단절들이 미국인 가족과 일본인 가족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같은 가족이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는 우리네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보이는 소통의 단절. 영화는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는 식으로 빛을 던져주면서 끝을 내리지만 과연 희망이 있는걸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야겠지.....

아무튼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이랄까.. 그리고 그간 내 몸 하나 가누기도 버겁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 계기를 준 영화이다.

PS. 2~3일간에 걸쳐서 조금씩 쓴 글이라 안그래도 글쓰는 재주가 없는데 더욱 더 앞뒤가 안맞는 글이 되어버린듯 -_-;;; (어차피 다 안 읽었겠지만 ㅋㅋ) 아래는 필름2.0에서 퍼온 영화평론가 최은영씨의 영화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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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에 이은 세 번째 장편영화로 돌아왔다. 데뷔작 때부터 걸작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멕시코의 젊은 거장은 신작 <바벨>을 통해 고립과 단절, 소통 불가능한 세계의 살풍경을 제시한다. 영화평론가 최은영이 <바벨>의 생경하고도 참혹한 여정을 가늠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세 번째 장편영화 <바벨>은 전작 <21그램>처럼 시간 순서와 공간이 퍼즐처럼 뒤섞여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화법을 구사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전작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진행되는 셋 혹은 네 개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 한 에피소드에서 출발한 사건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인 비극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된다. 그러나 이냐리투의 영화들에서 비극의 시발점은 그저 이야기의 시작점을 잡고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기능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재앙의 씨앗은 이미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뿌려져 있고, 그들은 마치 전신에 다이너마이트를 감고 언제든 산산이 부서질 채비를 마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기만을 바라는 자살 직전의 사람들. 이냐리투의 인물들은 늘 폭발 직전에 놓여 있다. 따라서 그가 비극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냐리투의 영화가 언제나 이야기의 처음이 아니라 중간에서 시작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가 도려내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이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순환하는 삶의 비극의 한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내러티브

유사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21그램>과 <바벨> 간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도 존재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간적 좌표점들의 확장이다. <21그램>의 지리적인 배경이 미국에 한정돼 있는 반면, <바벨>은 미국과 멕시코, 모로코, 일본이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문화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두 영화가 근본적으로 관계와 인간성 회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다른 사회적 상황들을 상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21그램>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연쇄는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계급 간의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벨>은 이라크전과 9.11 이후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상황을 보다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바벨>은 공간이나 지리적인 개념이 아닌, ‘지정학적 내러티브’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이냐리투의 이전 작들과 갈라선다.

<바벨>의 비극의 도미노는 아시아를 비롯한 미국의 정치적 자장 안에 놓여 있는 다양한 국가들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그다지 멀지 않았던 한 비극을 상기시킨다. 한 모로코 소년의 장난이 빚어낸 테러리스트 소동과 그 파장이 불러일으킨 도미노 현상은,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이라크전과 테러가 직접적으로 우리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격인 김선일 사건과 흡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바그다드를 공습하는 포탄들의 불꽃놀이와 참혹한 불기둥의 이미지로 각인된 전쟁이 순식간에 야만스러운 방식으로 살해되는 한국 민간인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이미지로 우리의 안방에 던져진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21세기의 비극을 감상하던 이들에게 눈을 가린 한국인 청년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를 새겼다. 여기서 <바벨>이 보여주는 비극의 연쇄 메커니즘은 21세기에 와서는 단순히 구조의 유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냐리투는 모로코의 황량한 사막과 생경한 멕시코, 미국 국경지대의 사막, 그리고 농아 소녀가 공포에 차 바라보는 도쿄 빌딩의 사막을 한 줄로 꿰어 연결시킨다. 한 자루의 장총으로 희미하게 연결돼 있는 세 개의 사막은 그곳에 머무는 인간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삶에 대한 극도의 절망감을 재현한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서로 다른 세 개, 혹은 네 개의 시공간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비슷한 상황 아래 병치된다. 그리고 그 병치과정에서 클라이맥스에 존재하는 이미지가 바로 이러한 직접적이거나 혹은 은유적인 사막의 이미지인 것이다. 모로코의 사막은 토착민에게 일상적인 가난과 황폐함으로 얼룩진 공간이며, 놀이 대신 노동에 시달려야하는 아이들은 총기를 장난감처럼 다룸으로써 쉽사리 테러리스트로 오인된다. 정신적 공동상태를 경험한 한 미국인 부부가 졸지에 총기의 피해자가 되면서 그들이 잠시 머무는 사막으로 둘러싸인 모로코의 작은 마을은 이국적인 관광지에서 테러와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공포가 극대화된 공간으로 변모한다.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이 돌보는 미국인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은 멕시코인 유모가 버려진 국경지대의 사막은 불평등과 착취로 얼룩진 두 나라 간의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은 지옥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통을 차단당한 농아 소녀 치에코는 거대한 대도시에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이냐리투는 치에코의 에피소드에서 카메라가 그녀의 시점으로 옮겨오는 순간마다 현실적인 소리들을 지워버린다. 소리가 사라진 도쿄의 디스코텍은 인공적인 조명으로 얼룩진 기괴하고 추악한 이미지로 보이며, 그녀는 자본주의의 무덤 속에 갇힌 유일한 생존자처럼 무언의 공포에 잠식당한다.

여행의 시작

<바벨>이 보여주는 에피소드식 구성은 일반적인 에피소드 구성을 채택하고 있는 영화들과 차이가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형식적으로, 또 내용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이러한 연결지점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인물들을 유사한 감정적 상태로 몰아간다. 네 개의 에피소드에는 공히 여행, 혹은 모험의 모티브가 존재한다. 인물들의 여행, 혹은 모험은 지난한 현실에 대한 반감과 도피의 정서로부터 비롯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모로코 소년 유세프와 아흐메드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장총’은 황량한 사막에 갇힌 그들의 젊음을 자극하는 낯선 물건이다. 유세프와 아흐메드는 총알이 나가는 거리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며 높은 언덕에서 총을 쏴댄다. 총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모든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총알은 강하고 빠르며, 멀리까지 나아간다. 유세프와 아흐메드의 장난은 자신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총에 대한 단순한 동경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경과 모험심, 욕망과 반항의 소산으로 그들의 손에서 발사된 총알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되 튀어 그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다. 사춘기 소년들의 욕망은 곧바로 그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멍에를 씌운다.

중산층 미국인으로 보이는 리처드와 수잔 부부의 여행은 모로코 소년들의 모험심보다는 외려 이냐리투의 전작 <21그램>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내적인 고뇌를 떠올리게 만든다. 알 수 없는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는 먼 모로코까지 왔지만 결코 그들을 옥죄고 있는 슬픔과 분노, 원망의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 사람을 비롯한 일군의 미국인 여행객들에게 모로코는 하나의 세계라기보다는 평면적인 이국적 풍경사진에 다름 아니다. 그들에게 모로코의 마을을 횡단한다는 것은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는 인간의 거대한 사파리 여행과도 같다. 그러나 신나게 사진을 찍고 모로코의 음식들을 불쾌하게 바라보던 미국인 여행객들에게 갑작스레 날아온 총알이 버스의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면서 그들의 안전한 여행은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마치 할리우드영화의 견고한 스크린과 같았던 버스의 유리창을 뚫고 실제로 탄환이 들어오자, 그저 흥겨운 볼거리였던 모로코는 순식간에 테러리스트가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공포스러운 낯선 땅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인들의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떠한 방어막도 없이 낯선 땅에 버려진 이들은 비로소 그들이 다른 문화, 다른 세계 속에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후기 네오리얼리즘 3부작이 바탕에 깔고 있는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여신 같은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영화 <스트롬볼리>에서 일용직 노동자인 미국 여성 카린은 대도시의 지루한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섬 출신의 낯선 남자와 결혼해 그의 고향인 스트롬볼리라는 섬으로 온다. 그러나 막상 초라하고 낯선 섬에 도착한 그녀는 낭만적인 섬 생활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히스테릭하게 변모한다. 섬 주민에 대한 경멸과 우월감은 그녀를 점점 더 고립시킨다. 로셀리니는 그녀의 히스테리에서 서구 유럽문명의 숨겨진 공포를 읽어낸다. 문명과 야만, 섬과 도시, 추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대조적인 가치에서 우월하다고 느끼는 카린의 모습은 <바벨>에서 수잔의 부상으로 인해 졸지에 모로코의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된 미국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은 마을의 초라한 삶에 경멸과 공포를 느낄 뿐이다. 아냐리투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리처드와 수잔 부부, 그리고 두 사람 때문에 발이 묶여버린 미국인 관광객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을 지켜보는 마을 주민이라는 삼각 구도에서 벌어지는 긴장과 히스테리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한다. 미국인 관광객의 공포와 히스테리는 공포로 인해 일으킨 전쟁이 되돌려주는 총알 세례에 우왕좌왕하는 미국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벨의 언어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대상에 밀착한다. 총을 팔기 위해 이웃집을 찾아가는 모로코 노인의 모습을 비추며 카메라는 사막의 메마른 기후, 황량한 풍경을 곧바로 인물들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예의 핸드헬드 카메라와 클로즈업을 고수하는 이냐리투 영화의 특성은 이 영화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카메라가 인물에 최대한 밀착하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이냐리투는 인물의 고립감, 절망감을 바깥 환경으로 투사함과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촉각적인 방식으로 그 절망을 경험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계급과 인종 간의 정신적 단절은 이 영화의 제목인 ‘바벨’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냐리투는 ‘바벨’이 의미하는 소통불가능성을 확장해 현대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삶의 명암이 다양한 방식의 단절을 생성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잔과 리처드의 에피소드가 미국과 아랍권을 둘러싼 긴장 관계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멕시코인 유모 아멜리아의 에피소드는 미국과 멕시코의 미묘한 관계를 횡단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은 역시 아이들과 아멜리아가 사막에 홀로 남겨진 순간일 것이다. 미국 샌디에이고의 집으로도, 멕시코로도 갈 수 없는 아멜리아는 두 나라의 경계에 놓인 사막에서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은 일본으로 건너와서는 아예 신체적 불구로 드러난다. 농아 소녀 치에코의 에피소드에 와서 관객들은 그녀와 더불어 신체적, 정신적 고립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바벨>은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을 보여주는 영화다. 여행, 혹은 모험이라는 모티브는 고립된 현대인을 강제적으로 낯선 세계와 맞부딪치게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다. <바벨>에서 인물들의 여행은 참혹한 세계의 진실을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서로에 대한 원망과 슬픔으로 냉랭했던 리처드와 수잔 부부는 총격을 당하고 모로코 마을에 머물면서 비로소 서로를 용서하고 마을 사람들의 친절을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자살을 목도한 충격과 슬픔으로 설 곳을 잃어버린 치에코는 아버지를 찾아온 낯선 수사관의 손을 잡고 오열하며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이냐리투의 휴머니즘은 고립감을 단박에 해소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립된 사람들 간에 이어진 가느다란 끈을 붙잡는 것이다. 리처드와 수잔이 두고 온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기고, 유세프가 형을 위해 총을 산산조각 내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해 있던 이들은 어두운 세계를 헤쳐 나갈 등불을 향해 손을 내민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은 영화라는 매체의 태생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문화, 다른 인간이 존재하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은 본래 영화라는 매체의 최초의 목적이었다. 시각적인 여행은 결국 사람들의 내면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여행으로 이행한다. <바벨>에서 낯선 체험은 곧 우리로 하여금 참혹한 현대의 불행과 맞닥뜨리게 만든다. 이냐리투는 결국 소통과 감정적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그의 영화를 여행하며 우리가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이름의 칠흑 같은 어둠이며, 메마른 사막이다. 이냐리투가 에필로그에 적어놓았듯, 우리는 오로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이름의 등불 하나로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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